작성일 : 08-12-2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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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 올림픽 전후하여 심각한 교회 탄압
지난 2001년 7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중국의 2008 올림픽 개최를 결정했을 때, 중국인들은 엄청난 흥분에 빠졌다. 그러나 중국의 올림픽개최권 획득을 계기로 전에 없이 세계의 언론과 인권단체들이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정부는 올림픽 개최를 국가적인 경사인 동시에 정권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지뢰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이슈는 종교의 자유에 관한 문제였다. 중국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들과 기자들은 중국정부의 신앙의 자유 억압의 실태를 앞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의 비등록 가정교회 관계자들에 대한 탄압과 구속, 처벌과 처형, 재판 없이 노동교화소에 수용하는 상황, 그리고 기독교 관련 문서들에 대한 압수 등의 사건 등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되었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올림픽을 전후하여 전에 없는 체제 단속과 가정교회에 대한 감시에 나섰었다. 반체제 성이 강한 인사들의 외국 언론과의 접촉을 한시적으로 금지시켰고, 일부 인사들은 ‘올림픽 종료시까지’라는 단서를 붙여 베이징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합법적으로 영업하던 베이징 올림픽 빌리지 인근의 기독서점 운영자가 체포되어 장기구금되기도 했다.
또 올림픽 기간 중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납득하기 힘든 행동수칙을 정하여 강요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이벤트나 퍼포먼스도 정해진 특별한 지역에 한해서만 허용했다. 또 선수들까지도 선수촌에 입촌할 때 종교적 상징물이나 서적, 도구 등의 반입을 일체 불허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가 강력한 항의를 받고 철회하기도 했다.
2. 이라크의 엑소더스
이라크의 기독교의 씨가 말라가는 듯하다. 이라크의 경우 후세인 통치 시절만 하더라도 전국민의 4 % 정도가 기독교계 주민이었다. 후세인은 자신의 정권 유지에 관심이 있었을 뿐, 철저한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통치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계 주민들은 편안하지는 못하다해도 그런대로 신앙을 가진 채 생활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미군이 들어오고 후세인이 권좌에서 밀려난 후부터 기독교계 주민들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시아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부터이다. 시아파는 이제 이라크의 명백한 집권세력이다. 미군의 영향력이 여전하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헌법에까지 반영시키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이란과 강하게 유착되어 있으며, 이란식 신정주의를 선호한다.
이런 분위기는 기독교인들의 생명과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했고, 결국 약 절반 정두의 기독교계 주민들이 시리아나 요르단으로 탈출했다. 그나마 기독교계 주민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지역은 모술 인근 지역이었다. 모술 지역은 지금과는 달리 이슬람 순니파 외에도 시아파, 쿠르드족, 그리고 기독교계 주민들이 전통적으로 공존해 온 지역이었다.
모술에서는 지난 10월의 첫 2주 간, 기독교계 주민 14명이 피살되는 등 기독교계 주민들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곳의 기독교계 주민들마저도 대거 해외로 탈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탈출을 계속했다. 이런 추세라면 이라크 전역에서 기독교계 주민들이 거의 소멸의 단계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현지에서는 기독교계 주민들에 대한 테러가 빈발하고 있지만,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지 그 주체가 활실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쿠르드인들이 그 배후라고 주장하고, 쿠르드쪽에서는 사담 후세인의 추종세력인 구 바트당의 잔당을 지목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의 간섭이 못마땅한 알카에다가 그 배후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테러를 저지르는 세력의 의도는 명백하다. 그들은 이라크에서 기독교인들을 완전히 소멸시키기를 원한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적 목표이기도 하고, 정치적 목표이기도 하다. 현재 이라크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계 주민들이 있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월간 세계선교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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